왕세자 시절 자신이 정현왕후의 아들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연산군은 즉위 이후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게 되고 급기야는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사사(賜死)시킨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철퇴로 내리쳐 죽인 뒤, 그 시체를 찢어 젓갈로 만들어 야산에 뿌리도록 했고 그 뒤에도 귀인 정씨의 아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강제로 대왕대비전으로 끌고가 인수대비에게 술잔을 강제로 따르게 하였으며 그 뒤에도 '왜 나의 어머니를 죽였느냐'고 인수대비에게 고함을 지르며 행패를 부렸다.[19]
이후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(齊獻王后)로 추존하려 하자 병상에 있던 인수대왕대비가 이를 꾸짖었으나 화가 치밀어오른 연산군은 인수대왕대비의 가슴을 밀쳤다. 이에 인수대왕대비는 얼마 후 그 충격으로 갑자년인 1504년 4월 27일, 68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.[20]
인수대왕대비는 이미 죽기 서너 달 전인 1504년 1월경에 노환으로 목숨이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데, 이 때문에 당시 연산군은 의정부의 삼정승(三政丞)과 육조의 판서들을 불러 미리 상제(喪制)를 의논하고 있던 시기였다.[21] [22] 그런 상황에서 연산군은 병석에 누워있던 할머니에게 고함을 지르며 행패를 부려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. 조선은 유교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였고, 그 중 임금에게 적용되는 가장 큰 덕목은 효(孝)이므로, 이와 같은 연산군의 패륜적인 행동은 훗날 박원종이 중심이 되는 중종반정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.
เป็นเรื่องเกี่ยวกับประวัติศาสตร์ อยากทราบว่า พระเจ้ายอนซันสั่งฆ่าย่าแท้ๆของตัวเองจริงหรือเปล่า
ขอรบกวนหน่อยค่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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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후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(齊獻王后)로 추존하려 하자 병상에 있던 인수대왕대비가 이를 꾸짖었으나 화가 치밀어오른 연산군은 인수대왕대비의 가슴을 밀쳤다. 이에 인수대왕대비는 얼마 후 그 충격으로 갑자년인 1504년 4월 27일, 68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.[20]
인수대왕대비는 이미 죽기 서너 달 전인 1504년 1월경에 노환으로 목숨이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데, 이 때문에 당시 연산군은 의정부의 삼정승(三政丞)과 육조의 판서들을 불러 미리 상제(喪制)를 의논하고 있던 시기였다.[21] [22] 그런 상황에서 연산군은 병석에 누워있던 할머니에게 고함을 지르며 행패를 부려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. 조선은 유교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였고, 그 중 임금에게 적용되는 가장 큰 덕목은 효(孝)이므로, 이와 같은 연산군의 패륜적인 행동은 훗날 박원종이 중심이 되는 중종반정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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